종교 에세이 모든 나무를 보라
- KA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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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별명들이 있다. “호빵목사” 또는 “초코파이목사”라는 별명은 내가 레이더 사이트에서 공군군목으로 군무할 때 그 부대의 군인들이 붙여준 애칭이다. 특별히 밤에 외곽지역 초소를 지키고 있는 경계초병들을 위문할 때 붙여진 별명들이다. 산꼭대기에서 적막한 밤마다 경계를 서는 초병들은 외롭다. 쓸쓸한 밤을 혼자 지새운다. 초병들은 고독함을 달래기 위해 가끔 서로 무전기로 노래자랑대회를 하든지 연애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우울증에 빠져 낭떠러지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거나 바스락 거리는 바람소리에도 우발적인 총기 사고도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사고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 군목은 자주 야밤에 초소들을 위문한다. 먹을 것들을 들고 찾아가 상담도하고 같이 기도도 한다. 대단한 도움은 아닐지 몰라도 밤에 자지 않고 부대를 지키는 사람들에겐 잠을 이길 수 있는 시간이 된다.
그런데 초병들과 함께 잠을 자지 못하는 또 한 사람이 있다. 그 부대의 책임자, 부대장이다. 레이더 사이트의 부대장은 초병들이 긴장감을 늦추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깨어 있도록 하기 위해 마치 암행어사처럼 예고도 없이 혼자 산악 외곽부대를 순찰한다. 부대장은 초병들에게 “항상 철저하게 경계하라.” “항상 깨어 있으라.”고 외친다.
동일한 요구가 성경에도 있다. “경계하라.” “항상 깨어있으라.” 이 짤막한 말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생애 마지막 주간을 보내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런 그의 충고가 오늘 편안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에 관해 그분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알고 계신 것은 언제 도끼가 나무 위에 떨어질지, 언제 아기가 태어날지, 그리고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올지 같은 것들을 기다리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분이 알고 계신 것은 기다린다는 것이 어떻게 일종의 고독한 감금(제한 solitary confinement)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다림으로 인해 고독하게 갇히게 되면 모든 감각들이 무뎌지고 생각이 방황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쉽게 잠에 빠지는지, 또한 초조해서 손톱들을 물어뜯어 피를 나게 하는지도 알고 있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그 한 가지가 빨리 오지 않기 때문이며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마음대로 오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별한 어떤 것을 기다리고 있을 때, 우리의 두뇌는 기다리고 있는 것 이외의 모든 것들을 제외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런 것을 경험한 적 있는가? 만일 여러분이 새벽 2시에 집 앞 도로위에 어떤 자동차 하나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것도 갓 운전면허증을 딴 18살 먹은 아들이 몰고 나간 자동차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겐 비행기가 지나가는 굉음이나 냉장고의 엔진소리가 꺼지는 소리조차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의 두 귀, 여러분의 전 존재가 하나의 주파수에만 맞춰진다. 아들이 몰고 나간 여러 달 동안 미뤄왔던 엔진 조율이 안 된 중고차의 덜거덕거리는 소리에만 맞춰진다. 만일 그 자동차 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여러분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려한다면, 여러분은 듣는 척만 할 것이다. 아들의 자동차가 동네 거리로 들어오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는 다른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을 때는 그 이외의 어떤 것에 주의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증명하는 게임 하나를 고안했다. 그 실험게임은 이렇게 진행된다. 과학자들이 여러분을 카드 한 벌이 놓인 탁자 앞에 앉히고는 6장을 재빠르게 지나가게 하면서 가능한 빨리 그 카드들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 맞춰보라고 요구한다. 다이어몬드 9, 하트 3, 크로버 잭--아이고! 그 다음 카드 세 장이 무엇이었지? 과학자들은 한 번 더 보여준다. 이번에는 조금 느리게. 그래야 여러분이 처음에 놓친 카드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기에. 두 장을 더 찾는다.
마지막 기회로 세 번째 보여줄 때는 매우 느리게 지나가게 한다. 그런데도 매우 간단한 마지막 카드 하나를 찾을 수 없는 여러분은 자신의 머리를 치면서, “아이, 이 바보!”라고 말한다. 자신이 바보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여러분 스스로는 어떤 카드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확신할 수가 없다. 모든 카드들이 당신 앞에 있는 탁자 위에 드러나기까지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 수 없다. 끝까지 찾지 못한 그 신비의 카드는 바로 스페이드 6로 검은색이 아니라 유일하게 붉은색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과학자들이 여러분에게 카드 한 벌을 가지런하게 보여줄 때 그 비밀스런 카드를 숨겨두었다. 그런 후 세 차례의 기회를 주면서 6장을 천천히 보여주었는데도 여러분은 붉은 스페이드 한 장을 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스페이드들은 모두 검은 색이라고 미리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 지켜보더라도 우리의 기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전 지식이 무엇이 있는지를 보지 못하도록 방해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는 주님의 재림도 이와 같이 시간 낭비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이 어떻게 나타날 것이라고 이미 고정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자가 날개 달린 흰 말을 타고 구름 사이로 오실 것이라고, 아마 청와대 잔디 위에 내려앉을 것이라고. 또는 스케이드 실내 경기장에.
그런데 만일 그분이 당나귀를 탄 과테말라인으로 오신다면, 또는 털이 긴 소를 탄 국외 추방된 티베트인으로 오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등 뒤로 머리털을 가늘게 따 곱슬곱슬하게 한 헤어스타일을 하고는 찌그러진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집 없는 사람으로 나타난다면? 결국, 성경에서 나사렛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주인공을 놓치고 만다. “이 사람은 촌사람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붉은색 스페이드들은 항상 찾아내기 힘들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아라.”고 말씀하신다. 왜 하나의 나무만을 언급하지 않고 모든 나무들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라는 것인가? 결코 붉은색 스페이드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런 일은 대학원 수준이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아직도 유치원 수준에 머물러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어디에 나타나실지 배우기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 주위의 세계에 주의를 기울임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거리 모퉁이마다 일어나는 비유들이 있고 모든 광장마다 하나님 나라를 여는 열쇠가 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것들을 보지 않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들을 보라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이유이다. 그들이 얼마동안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추상적인 것들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심판이나 구원, 또는 지진들이나 재앙들과 같은 극적인 것들에. 그들의 주의를 싹이 돋아나는 나무들에로 돌리게 함으로, 예수님은 그들이 그렇게 한 두가지에 집중하여 너무 열심히 찾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들의 삶의 매우 평범한 사건들 속에서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도록 하신다.
화가 Georgia O'Keeffe는 이런 말을 했다. “어느 누구도 진정으로 꽃 한 송이를 보지 않는다. 꽃 한 송이를 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마치 친구 하나를 사귀는 것처럼 시간이 걸린다.” 우리도 주변사람들로부터 매일 이런 말들을 듣는다. “나는 시간이 없어요. 나는 시간이 부족해요.” 나 스스로도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진리는 내가 항상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테레사 수녀나 6개월 된 갓난아기보다는 다소 시간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과 중요한 차이 한 가지란 그 동일한 시간을 내가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관해 다르게 결정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인생시계(Life Clock)에 관해 들어보았는가? 원래 시카고 출신 두 남자가 발명한 것인데, 삼각형의 3차원적 2등변같이 생겼다. 그것을 약 300달러에 사서 자신의 나이와 성을 입력시키면, 그 시계가 당신의 남은 생애의 시간, 분, 초를 계산해서 알려준다. 남자의 경우는 75세까지, 여자는 80세까지 살 것으로 추정해서. 너무 우울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 그 시계는 60초마다 영감 있는 메시지를 전한다, “모든 저항은 당신의 생각에서 시작된다.” 또는 “채소를 먹어라.”와 같은 말들을.
그 시계가 등장하자마자, 한 신문 기자가 발명가 중의 한 사람에게 질문했다, 그 시계가 매우 불건전한(우울하게 만드는) 발명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그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는 “당신이 시간을 양적으로 이해할 땐, 당신 인생의 질이 늘어나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그의 파트너도 동의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태어났다. 그런데 시간은 우리의 인생 태엽을 감고는 이렇게 말한다. ‘자 보라. 당신이 자신의 생명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나는 그 시계가 매우 불건전한 발명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또한 내가 아는 것은 시간이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을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빠르게 또는 느리게 지나가든지, 시간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다. 여기에서 떠오르는 질문은 어떻게 우리가 시간을 사용할 것인가이다. 어떻게 우리가 기다릴 것인가?
무화과나무를 보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서 뿐 아니라, 또한 지금 당장 우리 앞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관해서도 주의하라고 초청하는 것처럼 들린다. 마치 그 소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종교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을 통해, 심지어 무화과나무가 피는 것처럼 세상적인 것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다가오실 수 있다는 열쇠처럼 들린다.
아마 여러분은 이미 묵시(apocalypse)라는 단어가 계시(revelation)를 의미하는 것을 안다. 여러분이 자신의 인생 절반 동안 보았던 어떤 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리고 갑자기 그것을 처음 바라볼 때, 그것이 진주 빛 복숭아 같은 나무들을 통해 솟아오르는 태양이나, 여러분의 이웃의 눈에 있는 슬픔이나, 거울로 자신의 등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든지. 계시는 여러분이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 지를 초월해서 정말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관통해, 안을 볼 수 있는 순간이다. 여러분이 천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렇게 하도록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우연히 그 시간에 대해 주의하게 된다.
예수님은 “경계하라. 항상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언제 헬멧을 쓰고 지하 피난처로 향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지만,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올 때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하나님이 오실 때 하나님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일어나 너희 머리를 들라. 왜냐하면 너희의 구원이 가까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방법들은 여러 가지이다. 가장 안 좋을 때에도 여러분은 기다리고 있다. 한 여성은 자신이 8살이던 1940년에 독일군이 영국 런던에 폭탄을 투하할 때 조부모들과 함께 도시 중심부에 살았다. 조카 Bettine와 Blitz라는 양치기 개와 함께. 공습경보가 울릴 때는 가족들과 함께 모래주머니들로 만든 차고에로 숨었다. 그들은 그 피난처를 같은 나이의 딸을 가진 스웨덴 부부와 함께 사용했다. 그런데 그런 순간에도 그 아이가 기억하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재미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우리는 누구도 보지 못한 모래주머니들 속에서 많은 것들을 보았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 모래주머니들 속에서 금을 찾다가가 다시 그 속에 감췄다. 어떤 때는 도깨비와 요정들도 발견했다. 그곳에는 어른들이 볼 수 없었던 모든 세계가 있었다. 어른들은 침대에서 일어나 책들을 읽다가도 우리가 너무 큰 소리로 떠들면, “쉬, 폭탄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없잖아.”라고 꾸짖었다.
“그 때 우리도 듣곤 했다 그리고 만일 폭발음이 가까운 곳에서 들린다면, 무서웠다. 오직 스웨덴 딸만이 우리에게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가르쳤다. 그 아이가 말했다, ‘등을 대고 누워서 가슴 위에 팔로 십자가를 만들어. 그러면 하나님이 너희를 보호해주실 것이야.’ 폭탄들이 멈춘 후, 우리는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우리는 밖으로 기어나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추악한 것들을 쏟아 부은 그 아름다운 하늘을. 어떤 관리자가 플래쉬를 들고 따라 나와서 우리를 안으로 들어가라고 쉬하며 쫓았다. 그런 다음 블리츠 개가 우리와 함께 침대 안으로 들어오곤 했으며 할머니가 우리에게 매우 멋진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전쟁 당시에도 우리는 정말로 좋은 시간을 가졌다!”
분명히 기다리는 방법들은 여러 가지이다. 희망이 사라진 사람들의 기다림에는 긴장과 공포가 가득 찬 기다림이 있다. 스페이드가 항상 검정색 스페이드이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포기된 기다림이 있다. 강박감에 찬 기다림도 있는데, 그런 기다림에서는 기념품 숟가락들 같이 마지막의 표시들을 모은다. 모든 패들을 취하라--훅!--그러면 놀라운 기쁨이 온다.
이런 모든 것들에게 나타나는 문제는, 내가 말할 수 있는 한, 그들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하는 동일한 규칙들에 따라 움직이시며 결코 패속에 예측할 수 없는 wild card를 슬쩍 집어넣지 않으실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이 모두 wild card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빨간색뿐 아니라, 초록색, 또는 푸른색인 것들까지 포함시키신다면. 그와 같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유일한 방법은 경계하며 항상 깨어 바라보는 것뿐이다. 그래야 매일의 삶에 제공되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는 표시들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골목 비유들과 묵시적 무화과나무들, 모래주머니 속의 금, 그리고 하늘로부터, 아름다운 하늘로부터 폭탄들이 투하되는 데에도 배를 움켜잡고 웃는 아이들.
우리는 어떻게 기다릴 것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방법은 가능한 깨어있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온전히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다시 오실 분 때문에. 다시 오시고, 다시 그리고 또 다시 , 다시 오실 분 때문에.
/ 대구일보 2009. 1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