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에세이 바쁘다고 사기 치지 맙시다
- KA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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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2차 대전이 일어나는 동안 나치 독일은 정복한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수백만 명의 유태인들을 학살하였다.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의해 정복당한 후 어느 날, 프랑스 남부 샹봉(Le Chambon)이라는 작은 마을, 개혁교회의 목사 안드레 트로메이(Andre Trocme)가 강단에 올라가 이렇게 설교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폭력자들의 양심에 영혼의 폭탄들을 던짐으로 저항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후 4년여 동안 그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설교 말씀대로 실천했다. 유태인들을 돕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목사를 따라 유태인들을 숨겨주면서 국경선을 넘어 중립국 스위스로 탈출하는 것을 도왔다. 그 일로 몇 명의 동료들이 생명을 잃었지만 그들은 선한 일을 위한 놀라운 믿음과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 마을 사람들과 주변의 작은 부락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약 5천명이 유대인 5천명 이상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한 마을 사람들 모두가 어떻게 그처럼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위험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는지에 대한 그들의 대답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영혼의 폭탄들”(Weapons of the Spirit)이라는 영화로 만들던 제작자에게 그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 결정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토론 같은 것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단지 도왔을 뿐입니다....성경은 배고픈 자들을 먹이고 병든 자들을 방문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이런 말들은 그 마을 사람들에게 토론이나 투표와 같은 과정을 통해 명확하고 극적인 “결정의 순간”에 다다른 것 같은 경험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은 어떤 도덕적인 계산법에 따라 상황을 윤리적으로 인식하고 분석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앙에 따라 행동을 취했을 뿐이었다.
그들이 영웅이라고? 아니다! 그들은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확실히 그들은 교회를 다니는 자들이었다. 확실히 그들은 자신들을 지도하던 목사를 믿고 따랐다. 그들은 단지 신앙인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온 것을 행하였을 뿐이다. 신앙을 실천하면서, 그들은 신앙인이 되었다.
한 작은 마을 사람들에 의한 선행 실천이 오늘날 우리들로 하여금 지위와 권력들에 저항할 수 있도록 만든다. 용기를 실천하면서, 우리는 용기 있게 된다. 환대를 실천하면서, 우리는 후하게 대접하게 된다. 희망을 실천하면서, 우리는 희망이 넘치게 된다. 그런 선행들이 우리에게 제2의 본성이 될 때까지 실천할 때 더욱 그렇다.
왜 오늘 우리들은 지위와 권력을 우리의 문 앞에서 머리 숙이도록 만들지 못하는가? 우리가 바쁘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우리를 정직하게 만드는 사람들과 계속 교제하지 않는가? 우리가 바쁘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우리의 컴퓨터에게 하듯이 우리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는가? 우리가 바쁘기 때문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제사장과 레위인 등 하나님의 일을 맡은 신앙인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주님의 일을 하기에 너무 바쁘다고 말하면서 죽어가는 사람을 지나쳐 간다. 신앙과 실천의 거리를 점점 더 멀게 하는 것이 바로 분주함이다.
그렇다. 높은 지위와 권력을 지닌 자들의 주된 전략 하나가 우리를 분주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실제로 구성원들을 분주하게 만드는 단체들에서 나타난다. 우리를 분주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에든 깊이 관여하지 못하도록, 주저하게 만든다. 분주함은 우리가 항상 무엇인가를 더 많이 행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만들 뿐이다. 분주함은 우리들을 지치게, 악화되게, 분열되게, 그리고 타락하게 만든다. 만일 우리가 우리를 분주하게 만드는 것이 거짓된 선행임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너무 많은 우리의 습관들이 그런 거짓된 선행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쁘다는 것 때문에 모든 것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바쁘다는 것은 향후 잘못된 결과에 대한 면죄부가 아니다. 우리는 바쁘게 살면서 선행을 사칭하는 교묘한 방법을 배우고 있다. 진실한 선행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는 것 같이 느끼게 한다. 그러나 거짓된 선행은 우리를 나쁜 일을 하는 것조차 좋게 느끼게 만든다. 무엇보다 우리 가운데 아주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사기성 선행이 바로 분주함이다.
/ 대구일보 2008. 9. 22. 허도화(계명대 교목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