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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학 논문 설교와 문화의 대화: 21세기를 위한 설교자의 복음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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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와신학3(1999)-설교와 문화.hwp (File Size: 48.5KB/Download: 0)

설교와 문화의 대화21세기를 위한 설교자의 복음이해

허도화 (계명대 예배설교학)


* 본 연구 논문은한국문화와 예배3(1999):79-105에 실려 있음.


1951년에 H. Richard Niebuhr가 쓴 자신의 고전적인 책,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문화와 대립되는 그리스도, 문화의 그리스도, 문화를 뛰어넘는 그리스도, 그리고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와 문화에 관하여 말하였다. 그의 위대한 연구는 40여년 이상 문화에 대한 교회의 전략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가 나눈 범주는 오늘날의 교회가 적용하기 어려운 것 같다. 그 이유는 오늘 우리의 세계가 다양하게 흩어져 변하며 나누어지고 있는 경향이 있는 것과 비교할 때 문화에 대한 니이버의 정의가 너무 정체적이다. 그럼에도 니이버가 던진 이슈들은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고 지금과 같은 변화의 시대에는 더욱 우리의 관심을 끈다.

최근에 교회를 찾는 자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경향은 그들이 과거처럼 교회의 이름과 관련된 교단, 교리, 신학에 의해 교회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주로 교회의 내용과 관련된 예배와 설교의 형식 또는 목회의 형식(철학)에 의해 교회를 선택한다. 이런 변화는 문화가 가지고 있는 <아교성> 때문이다.1) 우리의 공동 관심사를 함께 묶는 문화의 아교성은 다목적 소비자 사회에서 추구하는 다양성으로부터 우리 자신들을 즐겁게 하고, 만족시키고, 하나님과 이웃들에 대해 좋은 느낌을 주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였다. 개 교회 안에는 크게는 보수, 진보 또는 진보적 보수로 나누어진 다양한 신앙, 교단, 신학을 경험하고 주장하는 교인들이 섞여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교회들은 과거로부터 내려 온 문화와의 괴리감으로 문화와의 대화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기독교의 신앙을 문화를 떠난 빈 머리들에게 설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의 설교가 잘 형성된 모든 종류의 문화로부터 다양한 배경을 가진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설교와 문화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때이다.

문화에 대한 교회 강단의 입장은 무엇인가? 문화는 신앙 좋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체를 위협하는 어두운 시대인가? 또는 문화는 인간의 모호성의 산물, 즉 우리의 죄성에 대한 표시와 동시에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축복 받은 것에 대한 증언인가? 21세기를 바로 앞에 둔 설교자는 더 이상 칼 바르트와 보수주의자들이 강하게 거부 반응을 나타냈던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이제는 그들과 약간 다른 위치에서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 신학과 강단을 생각해야 한다.


  당신은 복음을 설교하는 자유를 누립니까?” (Are you free to preach the gospel?) 이 질문은 1963년 바르트(Karl Barth)1963년 바젤(Basel)을 방문한 남아프리카의 독일 개혁교회 목사 스미스(Nico Smith)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바르트의 질문은 수년 동안 스미스에게서 떠나지 않았고 그의 설교 사역의 방향을 새롭게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질문은 오늘 설교 사역을 위해 헌신한 모든 이에게 적용된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복음을 설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인 우리가 복음이 무엇인지, 설교에서 복음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복음을 설교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바로 알고 나면 우리가 복음을 설교하는 자유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의 자유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충실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먼저 생각해 보자.

설교의 건강과 힘은 복음을 바로 이해하는데 달려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설교에서 복음과 그 중요성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정말 우리가 지닌 문제 중의 하나이다. 많은 청중들은 설교가 사회적이며 문화적인 문제들을, 그리고 매우 정치적인 것들을 피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이런 문제들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이 도전을 받을 때 심하게 반대한다. 따라서 설교자들은 성도들이 그 시대의 사회, 경제, 정치 문제들에 관하여 들으러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들으러 온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것이냐 또는 저것이냐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복음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설교가 개인적인 변화나 사회적인 변화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설교자들은 하나님을 개인적 삶의 문제들을 다루며 돕는 세계적인 치료전문가의 한 분으로 표현한다. 우리가 정말로 무엇을 설교하는지에 관한 위튼(Marsha Witten)의 보고에 따르면, 오늘날의 설교에서 하나님은 개인 남녀의 심리적인 부담들을 완화시켜 주는 도구의 하나가 된다.” 하나님은 죄책감과 자기의심의 고통을 덜어주고...가족들에게 견고한 가정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무엇을 선택할 지에 대한 우유부단함을 제거해준다.”2) 이런 설교들은 앞으로의 세상이 지금보다 더 많은 문제들을 가질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신앙이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돕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오늘의 설교에서 이와 같은 치료전문 중심은 매우 깊은 문제가 된다. 그 이유는 성서의 하나님께서 단순히 사람들이 어려운 세상에서 살아남도록 도우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 속에서 분명히 정의로운 사회와 세계를 다시 만드는데 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치료전문가인 하나님은 종종 우리 자신들이 느끼는 필요를 반영하는 그 이상이 아니다. 치료를 전문으로 삼는 설교는 쉽게 하나님을 그런 이미지로 만든다. 이와 같이 많은 설교자들이 복음을 오늘의 문화 속에 스며들고 있는 치료중심의 관심사에 맞추어 복음이 개인주의와 심리적인 경험으로 축소되어 버린다. ... (중략)
.........

1) Elmer Towns, Putting an End to Worship Wars. (Nashville, TE: Broadman & Holman, 1997), 11.

2) Marsha Witten, All Is Forgiven: The Secular Message of American Protestantism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1993), 3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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