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에세이 말하는 법
- KA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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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설교하는 목사로 그리고 선교하는 교수로 어떻게 내가 전하는 메시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처럼 들리도록 말할 수 있을지에 관해 생각한다. 나와 함께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 하지만, 나의 관심은 종교적이며 거룩한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고도 거룩한 것들을 말할 수 있을지에 있다. 그래서 나는 말하는 법을 알고 또한 말할 줄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라디오 방송을 하는 사람은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하는 사람들보다 말하는 법을 잘 아는 것 같다. 때론 라디오 방송이 말 잘하는 사람의 독백처럼 들리지만, 나를 잔잔한 호수 위에 있는 돛단배에 태우고 물결 따라 흐르게 만드는 자유로운 기분을 느끼게 한다. 또한 나에게 라디오 방송은 피곤한 두 눈을 쉬게 만들고 큰 의자에 기대어 영혼의 휴식을 즐기게 한다. 라디오 방송은 들으면 들을수록 깊이 생각할 수 있으며 내 자신의 경우에로 적용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한다. 방송이 내가 결코 만나보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할 때는 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사람들의 사소한 논쟁들과 두려움들에 관해 말할 때는 내 자신은 어떤가 생각하게 된다. 신학적 단어 하나 사용하지 않고서도 이 땅 위에 있는 평범한 생활이 지닌 거룩함을 설명할 때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게 만든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우리 모두가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하나의 이야기 정도는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며, 또한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를 친지로 만들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또 하나 라디오 방송이 지닌 멋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팔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사거나 참여하거나 받아들이거나 찬동해주기를 요구하지 않는 이야기들을 기다린다. 카메라의 움직임에 따라 말과 태도가 다르고 화면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치 합창의 후렴처럼 들리는 선발된 청중을 의식하는 이야기는 감동을 주기 어렵다. 이런 현상은 마치 교회의 제단으로 올라오라고 부르지 않고 아멘으로 화답을 요구하지 않는 설교가 청중이 자유롭게 감동을 받도록 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올바르게 행하던 사람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적인 사람들은 최소한 한 번 정도는 어떻게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처럼 들리도록 말할 수 있을지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 애완용 동물을 소유한 사람의 매우 일상적인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은 없는지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지역의 부동산 열기에 빠진 공동체의 가치들이 개인적 가치들을 삼켜버렸는지, 그래서 어떻게 사랑하는 이웃들 모두가 서로에게 경쟁자들로 변하게 되었는지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
이런 생각은 나에게 어떻게 교회가 문화에 대해 말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으로 변한다. 어떻게 우리의 말이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공격적이 되는가, 그리고 우리의 메시지가 복음과 같이 들리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직도 문화와 대화하려는 교회와 사람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들이 교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사람들의 마음이 부와 자기이익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의 마음에는 그런 문제들이 없는가? 교회도 자체적인 부와 자기이익의 유산으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지 않는가?
사랑의 집짓기 운동, 해비타트(Habitat)의 설립자인 풀러(Millard Fuller)가 그 운동의 시작에 관해 말한 것을 들은 기억이 난다. 한 여인의 가족이 첫 번째 지은 집 안으로 들어가던 날, 풀러는 이제까지 살면서 자신이 그 가족에게로 다가가 그들에게 집 열쇠를 건네주던 그 날보다 더 좋은 날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집 열쇠를 건네주면서 “제가 당신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것인가요?”라고 말하는 날을 잊을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사라, 참여하라, 받아들여라, 또는 투표하라고 요구하지 않는 말, 그러나 가능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언어들로 더 큰 생활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는 말을 전하는 날을.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다시 얻는 데는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지금은 예수님이 말하고 행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시 한 번 기쁜 소식을 말하고 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높이 쌓아 놓은 것들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눈으로 불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육체가 되는 간단한 말들로. 그것이 기쁜 소식들을 전하는 것으로 불러질 것이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들은 복 받은 자들로 불러질 것이다.
/ 대구일보 2009. 6.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