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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에세이 대구 지역 성직자 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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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대구로 온 후 선배나 동료 목사들로부터 들은 정보 중 가장 겁을 주던 말은 대구에서 목회하기가 가장 어렵다는 것이었다. 대구에서 1년 목회 한 것을 서울과 수도권에서는 2년으로 인정하고, 전라도 지역에서는 3년으로 계산을 해 준다는 것이다. 타 지역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대구에서의 목회가 힘들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대구의 교역자들이 즐겨 나누는 성직자 개그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나에겐 그런 개그가 통하지 않도록 도와 준 선배 목사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나에게 대구에서 살기가 그리고 목회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는가?

현재 정년퇴직을 한 후 의성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 목사님은 나에게 큰 가슴과 손을 지닌, 영원한 대구 목사이시다. 그는 대구 출신도 아닌 내가 대구를 사랑하게 만들었고 또한 멀리 떠났던 나를 대구로 다시 돌아오게 하신 분이다. 그는 내가 대구에서 처음 만난 목회자이었고, 대구 목회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던 나에게 처음으로 제2의 고향으로 만든 분이었다. 또한 그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한국의 사정에 서먹서먹하던 나에게 처음으로 나의 연구를 동역자들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기회를 준 분이었다.

이 목사님은 그 큰 가슴으로부터 깊은 정을 우려내어 그 큰 손으로 아낌없이 정을 건네는 분이다. 1979년에 목사 안수를 받은 나는 팔공산 공군부대에서 첫 군목 사역을 하기 시작했다. 인사차 대구 시내의 교회들을 순회하고 있을 때였다. 내 기억으로는, 이 목사님의 교회가 첫 방문 교회가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새로운 지역으로 부임해 인사차 교회를 방문하려는 젊은 목사는 큰 교회들을 먼저 방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목사님을 만난 후부터는 더 이상 다른 교회들을 방문할 수 없었다.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마치 수년 간 알고 지내던 후배를 맞이하듯 큰 가슴과 손으로 나를 붙잡으셨다. 그 후부터 나는 대구에서 지내는 동안 이 목사님의 교회 이외의 다른 교회를 다닌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나에게 다른 교회들이나 목회자들을 직접 소개해 주면서 대구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이 목사님은 그 큰 가슴과 손으로 그리고 아름다운 언어로 변치 않고 후배들을 아끼고 칭찬하고 격려하는 분이다. 부족한 후배라도 이 목사님을 만나면 가능성을 인정받고 성장한다. 즐겁게 그리고 감사하게 사역하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신다. 내가 이 목사님을 떠나지 못한 것도, 20년 후에 다시 이 목사님에게로 돌아 온 것도 바로 그분의 후배 사랑 때문이다. 나는 주일이면 팔공산 공군부대 교회에서의 예배가 끝나는 대로 산을 타고 뛰어 내려와 이 목사님의 교회 저녁 예배에 참석하였다. 성가대 지휘자로, 피아노 반주자로, 독창자로, 구역원으로, 교사로, 교목으로, 설교자로, 동역자로, 심지어 교회 창립멤버로....이 목사님은 나에게 무슨 일이든 믿고 맡기셨고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항상 칭찬하셨다. 그는 높은 산꼭대기에서 특수목회를 하던 부족한 후배에게 좋은 목회 경험을 쌓을 기회들을 주셨다.

이 목사님은 그 큰 가슴과 손을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 과거와 현재보다 미래를 향한 모험을 즐기는 분이다. 40대의 나이에도 섬기던 교회를 사임하고 선뜻 교회개척을 결심하고 교회를 세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전통적인 목회자의 영역을 뛰어넘어 사모님과 함께 신학교육, 학원선교, 사회봉사, 교도소선교, YWCA를 통한 여성신앙운동 등 다양한 사역들에 도전하셨다. 다소 열악한 환경에서 목회를 해야 하는 대구에서, 이 목사님과 사모님은 다양한 연합운동에 헌신하며 교회의 위상을 높였다. 은퇴 후에 더욱 은빛 나는 전원생활을 개척하며 더 크고 넓은 하나님의 세상교회를 열정적으로 목회하는 두 분을 만날 때마다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었다.

이 목사님, 그리고 사모님, 죽은 물고기는 물의 흐름대로 흘러가지만, 살은 물고기는 물의 흐름을 역류하여 헤엄칠 수 있다고 말하지요. 목사님과 사모님처럼 저와 제 아내도 언제 어디서나 살은 인간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 대구일보 2009.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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