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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에세이 용기 없는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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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두 종류의 불신앙을 보아왔다. 하나는, 외로우면서 동시에 다소 영웅적인 불신앙이다. 이런 불신앙은 길고도 고통스런 영혼의 여행 마지막에 이르렀어도 너무 논리적이어서 감동을 받지 못하거나 치유받기에는 너무 깊은 상처를 지닌 경우에 나타나는 결과이다. 한 여성은 자신이 노력했음에도 하나님을 믿을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 여성은 자신이 사랑하는 5살짜리 딸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그 날 밤 병원을 떠날 때, 그녀의 신앙도 함께 끝나버렸다. 내 경험으로는, 이런 종류의 불신앙은 흔하지 않다.

또 다른 불신앙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으로 바로 용기 없는 지식으로부터 온다. 즉 기꺼이 조사해보려고, 대담해지려고, 위험을 무릅쓰려고 하지 않는 나태함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런 불신앙은 마치 일종의 어설픈 불가지론 같은 무신론이 아니다. 이런 불신앙은 마치 내가 럭비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신앙 상태와 같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럭비가 정말 대단한 경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내 대답은 글쎄요, 그런가요? 저는 가끔 멀리서 럭비경기를 보긴 했지만, 직접 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하지도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저는 정말 럭비에 대해 모르겠습니다.” 내가 럭비에 대해 가지는 있는 가치나 불신앙인이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가치의 정도가 동일한 것 같다. 정말 용기 있게 경험해보지 않고 말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단편 소설 작가 오코너(Flannery O’Connor)가 현대 소설이 소멸해가는 것에 관해 안타까운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희망 없는 사람들은 소설을 쓰지 않을 뿐 아니라, 더 적절하게 표현한다면, 그들은 소설을 읽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무엇에든 길게 바라보지 않습니다. 이유는 그들에게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죠. 어떤 종류의 경험이라도 거절하는 것은 곧 실망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물론, 소설도 경험을 가지는 하나의 길입니다.” 오코너가 말하듯, 현대인들이 무엇에든 길게 보지 않는 이유가 꼭 우리가 확실하게 지적으로 게으르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용기가 부족하기때문이다. 어둠은 물리치기 힘든 상대이다. 그러나 그 어둠의 힘에 대해 방어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그 거대한 어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용기를 가지고 다른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소설이 우리의 무관심, 수동성을 유출시킨다는 말은 무엇인가 알면 알수록 그 지식이 자신의 이익을 방어하는 데는 유효하지만 오히려 타인의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현대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 중에는 불신앙을 지적인 성취로 착각하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자신의 두 발로 똑바로 서서, 더 이상 신앙적인 것들로 갈등하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 후에야 비로소 평안함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망각이 그들을 단순한 위로자로 만든 것이다.

왜 그처럼 불신앙의 늪에서 평화로움에 가득 차게 되는가, 왜 평안해지는가? 만일 믿음이란 것이 전혀 없다면, 좋게 말해 하나님이 단지 숨어만 계시는 분이라면(the Hidden God), 심하게 말해 단순히 가공된 상상들을 우리에게 투사한 존재라면, 단지 어느 정도 먼 곳에 피어난 백합꽃들의 아름다움 속에나거하시는 분이라면, 그리고 바다 저 먼 곳에서 태어난분이라면, 그 때 우리는 자유롭게 된다. 그렇다, 그 때 외로워진다. 해결해보려고 고민하는 실마리조차 없어진다. 그러나 그 때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쉼을 얻는다.

이런 평안함이 우리의 마음속에 욕망을 가짐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욕망을 질식시키는 방법을 깨달음으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주로 하나님 대신으로 선택한 성적인 것 외에는 어떤 것에도 열정을 가지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성적인 것보다 더 흥미 있는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믿음을 포기한 후 쉼을 얻고 평안해지는 것은 마치 끊임없이 일렁이는 조수에 의해 떠내려가는 작은 배처럼 어둠속으로 미끄러지면서 조용히 죽어가는 것 같다. 믿음이란 선물을 현대사회 속에 낭비해버리면 어떤 것도 우리를 분개하도록 만들지 못한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평화롭게 살면서 보다 나은 세상에 관해 계속 호기심은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나, 결코 그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희망을 결코 소유하지 못한다. 필요할 때 활용할 믿음이 전혀 없다. 오직 매일 실존하려는 사실들에만 매달렸을 있을 뿐이다.

그렇다, 사실들이다. 우리가 불신앙에 빠지는 것이 바로 우리가 현대적인 의식, 단지 사실들에 매달리게 된 이유이다. 현대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발달한 것은 우리의 방관적인 의식이다. 많이 배워서 알고는 있지만 방관한다. 뒤로 물러나, 관찰만하고 냉정하게 평가만 한다. 결코 감성적으로 끼어들지 않고 영구적인 여행자의 입장만을 취한다. 우리는 그처럼 방관적인 삶의 방식을 배우며 잘 섬겨왔다. 그것이 계산에 익숙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그런 삶의 방식이 순수한 사실들과 더럽히지 않은 진리, 그리고 명확한 대답을 생산한다고 알고 배웠다. 그러나 그런 나태함과 방관적인 삶은 우리의 삶을 가치 있도록 만드는 진리와 거리가 멀다. 우리의 삶을 가치와 의미 있게 만드는 진리는 오직 용기를 가지고 나서서 관여하고, 헌신하고 위험을 감수함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사용가능하게 된다. 나는 그것이 바로 신앙이라고 믿는다.

 

/ 대구일보 2008. 10. 10. 허도화(계명대 교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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