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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에세이 사람들이 말하는 진품과 모조품 사이의 경계선

  • KALAHKA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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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의 어느 토요일, 학교 교직원들이 학교 근처에 위치한 천마산으로 환경정화운동을 위한 등산을 갔다. 1시간 정도 걸려 정상에 도착한 일행은 부서별로 그리고 개인별로 가지고 온 도시락을 열었다. 펼쳐진 반찬들 중에는 한 직원이 자신의 집에서 정성스럽게 담근 매실즙이 가장 인기를 끌었다. 나는 계속 매실즙 마시기를 거절하다가 건강에 좋다는 주위 동료들의 강력한 추천에 따라 종이컵에 삼분의 일 정도의 매실즙을 받아 놓았다. 처음에는 끝까지 마시지 않기로 결심했건만, 그 종이컵 안에 든 매실즙이 김밥을 먹는 나의 눈앞에서 자꾸 물로 둔갑을 하면서 갈증을 풀어줄 것 같이 유혹하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그리고 미국유학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술이나 포도주, 맥주를 마셔보지 못했다. 내가 목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원기회복제라는 박카스를 조금이라도 마시면 눈과 목 부분부터 충혈 되는 증상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집에서 준비한 포도주나 발효된 매실즙이라도 조금 마시면 곧 바로 충혈 증상이 나타났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술이나 포도주를 전혀 마시지 않는 목사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나는 학교 직장생활을 하면서 술이 나올 수밖에 없는 회식자리에 가능한 빠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술 맛이나 기분을 깨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도와주기 위함이었다. 회식이 있을 때마다 내가 앉는 자리는 술로부터 안전지대임을 표시한다. 그 날 몸이 좋지 않거나 중요한 만남을 둔 사람들은 내 옆에 앉을 필요를 느낀다. 나는 가능한 회식에서 가장 끝자리를 선호한다. 술을 피하고 싶은 사람들이 쉽게 안전지대를 발견하고 자리를 내 쪽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경계선을 세우기 위함이다.

등산을 하던 날, 산 정상에서 맛있게 김밥을 먹던 나는 용기를 내서 매실즙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날따라 몸 상태가 좋아 가뿐하게 그리고 빠르게 정상까지 올라왔기 때문이다. 매실즙에 물을 타고 조금씩 마셨다. 얼굴이 빨개질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계속 과일과 물을 함께 마셨다. 주위 사람들에게 혹 변할 수 있는 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모자를 쓰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선글라스까지 썼다.

조금씩 얼굴색이 빨갛게 변하고 속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시원한 바람을 마시기 위해 조용히 식사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의지할만한 나무 옆으로 걸어갔다. 점점 호흡이 빨라지고 머리가 띵 했다. 눈을 뜨고 있으면 먼 산들이 가까이 다가왔다가는 사라지고, 눈을 감고 있으면 몸의 균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나는 나무를 붙잡고 몸을 지탱하려고 애를 썼다. 그 다음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 소위 술 먹은 사람들이 말하는 의식의 필름이 끊어진 상태를 경험했다. 주위 사람들은 내가 땅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면서 뒤로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놀라서 달려 온 동료들에 의해 부축을 받고 일어나 앉아 심호흡을 해 보았지만, 여전히 손과 다리의 끝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가슴도 흥분된 상태였다. 나를 지켜 본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나는 그 짧은 순간에 매실즙을 소량 마시고도 술을 많이 마신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상들을 골고루 경험할 수 있었다. 술을 먹은 후 왜 몸의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지, 왜 가슴이 뛰면서 불안하고 말이 많아지는지, 그리고 왜 행동과 언어의 실수를 하게 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지를.

사실 매실즙을 소량 마신 나에게 당연하게 나타날 증상이었지만, 그 자리에서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모습을 처음 목격한 사람들은 이런 말들을 남겼다. 진짜 목사라고. 가짜 목사가 아니라고. 정말 술과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이라고. 그들은 일반 직장에서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는 한 가지만으로도 진짜 목사와 가짜 목사를 구분하는 경계선을 가지고 있었다. 신앙의 경계선을. 그것도 수많은 말보다 한 번의 행동으로 보는 경계선을.

하지만 그날의 해프닝으로 인해 나는 다시 매실즙을 마시고 싶다. 비록 정신을 잃고 쓰러지더라도. 그렇게라도 내가 진짜 목사임을 증명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 대구일보 2010. 5. 29. 
(계명대학교 교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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