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율법 보다는 복음을 우위에 두며 제사의식 보다는 예언서의 말씀을 강조하는 종교개혁의 전통 속에서는 제사장 신학(Priestly Theology)이 구속사 신학이나 계약신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시되어 왔으며 제사장에 관한 것은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헤이스(J. H. Hayes)는 그 경향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P(제사장문서) 자료에 있는 제의와 거룩한 의식의 규정들에대한 경시는 개신교 초기부터 있어 온 요소이다. 사실 구약의 제의자료와 의식자료는 교회사를 통해 경시되거나 아니면 기독론이나 성찬론의 설명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질 뿐이었다. 제사장직에 대한 강조는 이신론(Deism) 이후 혹평당해 왔으며 19세기의 개신교는 예언자를 종교개혁가로 보고 이스라엘의 제사장직과 제의를 카톨릭과 동일시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루터가 일찌기 신약에 나타난 바리새인들을 카톨릭과 동일시한 것과 같다. 성서학 분야에서도 구약의 의식법에 주의를 가급적 기울이지 않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으며, 쾰러(Kohler)가 그러하였듯이 희생제사 제도를 인간 스스로가 구원을 얻어 보려는 희망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다. 여하튼 이러한 접근방식에 덧붙여 언급해야할 것은, 이스라엘의 제의에서나 어떠한 고대 제의에서 행해진 일은 별개 세상의 일이며, 은총과 보상을 얻는 방편으로 동물을 도살하여 제의적으로 처리하는 것은 현대인들에게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를 대중적으로 줄기차게 이끌어 온 신학은 제사장 신학이었으며 오늘날 목회 현장에도 알게 모르게 이 신학이 강조 되고 있음도 사실이다. 헤이스는 제사장과 제사장 신학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반드시 언급되어야 될 것은,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예언자들이 아닌 제사장들이 영혼들을 보살피는 책임자들이었으며, 제사장신학이 삶의 여러 면에서 그리고 삶의 여러 위기 상황에서 삶 전체를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의미체계를 고안해 내었다. 예언자들의 경우 그들 중 상당수가 제사장 출신이거나(에스겔) 제사장 가문 출신(예레미야)이었으며 그들의 예언 가운데 많은 부분이 제사 용어로 되어 있었다(이사야, 아모스, 호세아, 스가랴, 말라기 등). 더욱 주목할 점은 예언자들이 제사의식을 전면 부정하거나 제사장신학을 무가치하게 여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비록 예언자들이 그 당시 행해지고 있었던 제사 행위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퍼부었지만 제사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받는 정화제사(속죄제)와 속건제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예언자들이 비판한 제사의 종류는 감사제사인 번제와 소제 및 화목제 등이었다. 왕정 시대나 포로기나 포로후기에 이르기까지 예언자들이 제사를 전면 부정하는 태도는 찾아 볼 수 없으며 특히 포로후기에는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성전 재건과 온전한 제사를 예언자들이 앞장서서 주창하였다. 예언자들도 제사장신학의 기본골격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 제사의 잘못된 면을 지적하고 제사의 부분적인 개혁을 시도한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 지혜문학과 시편의 경우에도 성전 중심의 제사 제도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특히 시편은 예루살렘 제의를 이해하지 않고는 해석될 수 없는 책이다. 최근에는 제사장신학의 중요성이 재발견 되고 있으며 제사장신학이 구약신학의 중심점을 제공해 줄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까지 조심스럽게 발표되고 있다.
본논문에서는 먼저 제사장신학의 기본 구조를 제시할 것이며, 이 단계에서는 굳이 제사장문서(P)와 성결법전(H)을 구별하지 않고 종합적인 구조를 제시할 것이다. 제사장신학의 핵심은 정화제사(속죄제)에 있으므로 먼저 정화제사(속죄제)에 나타난 신학을 밝혀내고, 이어서 사람을 정상적인 삶으로 회복시키는 의식이 담긴 레위기 14장을 세밀히 분석하여 제사장신학의 핵심을 제시하고져 한다. 그리고 제삼장(III)에서는 제사장신학이 야웨종교에 기여한 점을 제시하여 전체적으로 제사장신학이 단순한 현상 유지 내지 전통을 고수하는 방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당면한 현실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이스라엘 종교를 개혁한 신학이었음을 밝히려고 한다. 본논문은 제사장신학 가운데서 이 신학의 핵심이라 여겨지는 피의 사용을 중심으로 그 범위를 한정하여 연구하게 될 것이다.
II. 제사장 신학의 기본 구조 - 피의 사용을 중심으로
1. 정화제사(속죄제)에 나타난 제사장신학
"하타아트 (chatta't)"를 보통 속죄제(sin offering)라 번역하고 있으나 이러한 번역은 원래의 의미를 왜곡시킬 우려가 있다. 여성 명사형 "하타아트"는 피엘형인 "히테 (chitte') - 정화(淨化)시키다"의 의미에서 유래된 단어로 "히테"는 "티하르(tihar)-정결하게하다"(겔 43:23-26)와 그리고 "키페르 (kipper)-정화하다"(겔 43:20, 26) 등과 유사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하타아트"를 속죄제라 번역하기 보다 "정화제사 (purification offering)"라 번역하는 것이 올바른 번역이 될 것이다.
"정화제사(속죄제)"는 정화(淨化)시키는 기능이 있는데 주목할 점은 정화의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성전이라는 사실이다. "정화제사(속죄제)"의 피는 성전의 부정을 청결하게 하는데 그 원리는 성전의 부정을 그 피가 흡수한다는데 있다. 따라서 "정화제사"의 피가 담긴 질그릇은 깨뜨려 버리고 (레 6:28) "정화제사"의 나머지 부분을 소각하는 사람도 정결의식을 거쳐야한다(레 16:16). 짐승이 피를 흘리고 대신 죽음으로 인해 죄인이 용서함 받는다는 대속의 의미는 이차적인 의미이며 본래의 의미는 성전을 정화시키는데 있다. 예를 들면 비고의적인 죄를 범할 경우 죄인은 죄를 뉘우치고 "정화제사(속죄제)"를 드리는데 이 때 사용되는 짐승의 피는 죄인을 씻는데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씻는데 사용된다. 그래서 죄인에게는 그 피를 뿌리지 않는다. 한편, 사람에게도 피를 뿌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의 피는 죄를 씻는다는 의미의 "하타아트" 피가 아니고 사람을 회복시키고 죽음의 영역에서 생명의 영역에서 옮겨 정상적인 삶을 유지 시키기 위한 정결의식의 경우이다(레 14장).
"하타아트"제사의 기본 원리는 그당시 편만했던 종교의식을 야웨종교 특유의 제사장신학에 의해 개혁한 것이었다. 고대 중동 종교들의 기본적인 전제는, 1) 신들은 영계(metadivine realm)의 영향을 받으며, 2) 영계는 선한 영과 악령을 배출하며, 3) 만약 인간이 영계에 들어갈 수 있다면 인간이 마술적인 힘을 발휘하여 신들을 조종할 수 있다는 전제들이다. 그러나 제사장신학은 이러한 전제들을 거부한다. 제사장 신학에는 악령(demon)이 없으며 하나님을 조종할 수 있는 어떤 다른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께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는 피조물인 인간인데 인간은 마치 악령과 같이 하나님을 성전에서 몰아낼 수 있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다른 종교에서 "부정"을 발생하여 신을 성전에서 몰아내는 악령의 역할을 없애고 대신 인간이 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제사장신학은 주장하였다. 제사장신학은 고대 중동 종교와 비슷한 면을 보이면서도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고 그당시 편만했던 종교의식을 과감히 개혁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인간 외에는 짐승을 포함한 자연 만물의 그 어떤 것도 성전을 오염시키는 부정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제사장신학은 인간 존재를 격상시켰으며 인간의 결단을 촉구한 신학으로 그 핵심이 "정화제사(속죄제)"에 담겨 있다.
"정화제사"에 나타난 제사장신학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을 때 범죄자가 당장 어떤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범죄로 인해 발생된 부정이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오염시킨다는 신학이다. 보다더 자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우선 죄의 종류 부터 구별할 필요가 있다. 크게 나누어 두가지 종류의 죄가 있는데 첫째는 비고의적인(회개한) 죄요 둘째는 고의적인(회개하지 않은) 죄이다. 그리고 개인의 비고의적인 죄는 제단을 오염시키고, 집단이나 제사장의 비고의적인 죄는 성소(향단)를 오염시키며, 회개하지 않은 고의적인 죄는 가장 큰 죄로서 지성소(법궤)를 오염시킨다. 비고의적인 죄는 죄인이 죄를 고백하면서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죄로 인한 부정이 발생할 때마다 제단과 성소의 오염된 것을 씻을 수 있으나, 고의적인 죄는 아무도 죄를 고백하지 않기 때문에 지성소가 오염된 체 방치된다. 지성소의 오염을 씻어내기 위해서는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 희생 짐승의 피로 오염을 씻어낸다. 만약 죄가 너무도 많아서 성전이 너무 오염되면 하나님은 성전에 계실 수가 없어서 성전을 떠나시게 되는데 이러한 지경에 이르면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더이상 보호하지 않음으로 백성은 멸망하게 된다. 에스겔은 유다가 멸망한 것이 유다 백성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셨기 때문이라 설명하였다. 야웨께서 계시는 지성소의 그룹들이 날개를 펴서 날으며, 성전 동문을 통과하여 예루살렘 성벽을 넘어 동편 산에 계신다 하였다(겔 10:16-19; 11:22-23; 애 2:7).
죄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구별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은 "죄의 고백" 여부이다. 죄를 고백하고 회개한 경우는 정화제사를 통해 성전을 정화할 수 있지만 죄를 고백하지 않을 경우는 정화제사를 시작할 수도 없기 때문에 죄 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없다. 오로지 대속죄일을 기다릴 뿐이다. 다시 말하면 죄를 고백할 경우 그 죄는 용서 받을 수 있는 죄로 그 무게가 가벼워진다. 오늘날 기독교인이 죄를 범했을 경우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간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심을 믿는다. 오늘날 죄의 고백이 죄 문제를 해결하는데 핵심인 것과 마찬가지로 제사장신학에도 죄의 고백이 가장 중요하다. 제사장 신학에서 죄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희생제물을 준비하여 제사장으로 하여금 정화제사를 드리도록 하는 것은 죄인 자신을 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전 오염을 정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제사장신학에서의 "부정(impurity)"이라는 개념은 "정결(purity)"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오염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이것은 사람이 범죄함으로 발생되는 어떤 것이다. 부정은 성전이나 제사장 등 거룩한 영역의 것들에는 치명타를 가할 수 있지만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 않는다. 따라서 범죄할 경우 성전은 부정에 의해 오염되지만 범죄자인 사람은 부정하게 되지 않는다. 부정하다는 유출병의 경우, 몸에서 흘러 나오는 유출물이 닿는 침상이나 옷 등은 부정하지만 유출병자인 사람은 부정하지 않다(레 15:1-5). 따라서 유출병자는 추방 당하지 않고 다만 자기 집에 거주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과 접촉하지 않도록 격리 시킬 뿐이다. 그리고 사람이 부정한 것이 아니기에 정결하게 된다는 것도 사람을 치료함으로써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따라서 정결의식에는 "치료하다 (라파 [rapa'])"라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으며 정결의식은 치료와는 별개로 행해지는 의식이다.
"정화제사"에 나타난 제사장신학에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은 "의인이 죄인과 함께 집단적으로 벌을 받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 제사장신학은 "집단적 책임"으로 답변한다. 즉 악인이 악행을 하도록 방치하고 예방하지 않은 책임이 의인에게도 있으며 그러한 행동은 "비고의적 죄"에 해당된다고 한다.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에 대해 제사장 신학은 면죄부를 발행하지 않는다. 이러한 신학은 예언서와 지혜서에서 속시원하게 해결되지 못한 신정론(神正論 theodicy)에 대한 새로운 해답을 제시해준 소위 "제사장 신정론 (Priestly theodicy)"이라 부를 수 있다. "제사장 신정론"은 오늘날 우리의 문제에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다. 문명의 발달로 지구는 좁아져가고 범죄와 화경문제 및 전쟁과 질병의 문제는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로 지구 사회 전체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서로가 책임의식을 느껴야하는 것이다. 공동책임 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무관심"을 제사장 신학에서는 죄라고 규정짓고 있으며 그 죄가 바로 하나님을 불편하게 만든다고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의 우리의 문제는 인간과 자연과 하나님을 포함한 공동체 전체를 바라보는 거시적 안목과 공동체 의식에서 출발하고 공동책임의식으로 우리의 문제에 다가갈 때만 우리의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2. 레 14:2-20에 나타난 제사장신학
정화제사에서 희생 짐승의 피가 죄로 인한 부정(성전 오염)을 씻는 기능을 한다면 레위기 14장에서 사람에게 뿌리는 피는 사람을 회복시키는 적극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레위기 14장에는 문둥병으로 인해 부정하다 선언을 받고 진 밖으로 축출된 사람이 병이 나았을 때 다시 진 안으로 복귀하여 자기의 집에 들어가기 위한 의식들이 나열되어 있다. 이 의식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 19장(붉은 암소 의식), 레 8장(아론의 임직식), 레 16장(대속죄일) 등의 의식과 비교 연구할 필요가 있다.
레 14:2-32 전체가 문둥병에서 낫은 사람을 위한 제사의식이지만 마지막 부분인 21-32절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보충 설명임으로 2-20절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2-20절의 구조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2-3 문둥병이 나았음을 제사장이 확인함
4-9 7일 동안에 거행할 의식
10-20 제8일에 거행할 의식
1) 제사장의 확인 (2-3절)
문둥병 환자는 부정하기에 진 밖에 격리되어 있으며 만약 병이 나으면 제사장에게 알려 제사장이 확인하도록 되어 있다. 3절에는 제사장이 진 밖에 가서 진찰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2절에는 환자를 제사장 즉 진 안에 있는 제사장에게 데려오는 것으로 되어 있어 상호 모순이 일으킨다. 더구나 제사장이 정결하다고선언하기도 전에 문둥병자를 진 안으로 데리고 들어 올 수는 없다. 2절의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 데려갈 것이요" 부분은 "그 사실이 제사장에게 알려졌을 때에"라고 번역할 수 있으며 이 절은 3절과 연결된 종속절로 번역할 수 있다. 2-3절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2절. 이것은 문둥병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에 그를 위한 의식이 될 것
이다.
그 사실이 제사장에게 알려졌을 때에,
3절. 제사장은 진 밖으로 갈 것이다.
만약 문둥병자의 병이 치료되었음을 제사장이 확인한다면,
이 부분에서 제사장이 하는 역할은 치료가 아니라 병자가 치료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다. 따라서 제사장이 "진찰하다"라는 진료행위를 나타내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부적합하며 제사장은 병자를 눈으로 관찰하여 병이 나았다 혹은 병이 낫지 않았다는 것을 선언할 따름이다. 그리고 정결의식에도 "치료하다 (라파[rapa'])"라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으며 정결의식은 치료와는 별개로 행해지는 의식이다.
2) 7일간의 의식 (5-9절)
제사장이 문둥병이 나았음을 확인한 후 정결의식을 거행하여 그사람을 정결하게 하는데 그 후에야 진 안으로 그사람이 들어 올 수 있다. 따라서 첫째날의 정결의식은 진 밖에서 거행함을 알 수 있다. 첫째날의 의식을 위해서는 정결한 산 새 두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그사람이 제사장에게 가져오도록한다. "산 새"란 들판이나 산에 날아다니는 새를 말하며 새를 놓았을 때 반드시 산으로 날아갈 수 있는 새를 말한다.
제사장의 지시데로 새 한마리를 잡는데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는다. 새를 "죽인다"에 사용된 단어는 "샤하트(shachat)"로 이 단어는 희생제사를 위해 새를 죽일 때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다. 희생제사에는 "그 머리를 비틀어 끊는다"(레 1:15)란 표현을 사용 하는 것을 볼 때 레 14장의 새는 희생제사를 위해 죽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진 밖에서 새를 잡는 것은 제사를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흐르는 물"은 "생명의 물 (함마임 하하이임 [hammayim hachayiym])"을 번역한 것으로 우물물이 아니고 흘러가는 물을 말한다. 새를 잡아 거행하는 정결의식은 다분히 상징적인데 "생명의 물"을 사용하는 것도 죽음의 영역에서 생명의 영역으로 이동시키며 회복시키는 정결의식의 목적과 부합됨을 알 수 있다.
첫째날 거행되는 정결의식의 특징은 새의 피를 그사람에게 뿌려 정결하게 하는 것이다. 피는 생명이며 피는 깨끗하게 하는 제의적 기능이 있으므로 문둥병으로 부정하게 된 사람을 피로 씻는다는 것은 있을 수 있으나 사람에게 피를 뿌린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정화제사를 통해 성전에 피를 뿌리지만 사람에게는 피를 뿌리지 않는다. 다만 사람에게 피를 뿌리거나 바르는 경우는 제사장문서에서 세번 나타날 뿐이다. 아론의 위임식(레 8장)과 시체를 만진 사람을 정결하게 하는 경우(민 19장)와 레 14장의 경우이다. 세번 모두 정화제사가 아니라 정결의식이며 영역이동과 관계된다. 시체만진 사람과 문둥병자의 경우는 진 밖의 죽음의 영역에서 진 안의 생명의 영역으로 이동하게 되며 아론의 위임식 경우에는 평민의 신분에서 거룩한 제사장의 신분으로 신분변화를 하게된다. 레 14장에서,이 피는 상징적인 역할도 하는데 새의 죽음과 문둥병자의 생명으로의 이동이 대비됨을 볼 수 있다.
살아 있는 다른 새는 들에 날려 보내는데 죽은 새의 피를 적셔서 보내게 된다. 이 때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도 함께 죽은 새의 피를 적시게 된다(민 19장 참조). 살아 있는 새를 날려 보내는 것은 마치 대속죄일에 아사셀을 위한 염소를 광야에 보내어 죽게하는 의식과 흡사하다(레 16장). 즉 산 새가 날아갈 때에 문둥병의 부정을 산 새가 흡수하여 멀리 들판으로 운반하여 제거시키게 되는 것이다.
정결함을 받은 자는 진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데 이 때 한가지 추가할 것은 털을 밀고 옷을 빨고 몸을 물로 씻는 일이다. 이러한 행위는 영역을 이동할 때 수반되는 행위이며 제8일에 제사를 드리기 위한 준비이다. 이러한 행위는 진 밖에서 진 안으로 들어 올 때나 제사장이 영역을 이동할 때 행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사람은 진 안에는 들어올 수 있지만 자기 집에는 들어갈 수 없다. 아직은 완전히 회복된 상태가 아닌 것이다. 7일 동안 집 밖에서 머물다가 제8일에 제사를 드리는데 이 날에는 속건제와 정화제사와 번제를 드린다.
3) 제8일의 제사
속건제가 정화제사 보다 먼저 드리게 되는데 그 이유는 정화제사와 번제를 드리기 전에 영역이동과 신분변화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속건제를 드릴 때 어린 수양을 희생제물로 드리는데 특징적인 것은 속건제물의 피를 그사람의 오른편 귓부리와 오른 손 엄지 손가락과 오른 발 엄지 발가락에 바르는 절차이다. 그 사람에게 피를 바르는 이 행위는 그사람이 죽음의 영역에서 생명의 영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완성시키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기름을 바르는데 제사장은 먼저 기름을 야웨 앞에 7번 뿌리게 된다. 이 기름 뿌림은 야웨께 기름을 바쳐 드린다는 의미가 있다. 그다음 제사장은 기름을 찍어 그사람의 오른편 귓부리돠 오른 손 엄지 손가락과 오른 발 엄지 발가락에 바른다. 피를 발랐던 그 곳에 기름을 덧붙여 바르는 것이다. 기름을 바르는 행위는 신분의 변화와 관계된다. 사람에게 기름을 바르는 의식은 아론이 제사장으로 위임을 받는 경우(레 8:23, 24) 또한번 나타난다. 아론의 위임식의 경우 기름은 제사장 신분으로 변경시키는 역할을 하며 평민의 영역에서 거룩한 제사장의 영역으로 신분 이동을 시키는 역할을 한다. 레 14장의 경우 기름은 공동체에서 축출된 사람을 다시 공동체의 일원으로 돌아오게 하여 신분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다. 속건제에 기름이 추가된 것은 기름이 화목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문둥병으로 축출된 사람이 다시 진 안으로 들어와 완전히 야웨의 백성으로 돌아와 야웨와 화목하게된다는 의미가 기름 바름에 포함되어 있다.
정화제사 보다 특이한 속건제를 먼저 드리게 되는 정화제사는 문둥병으로 인한 부정이나 그사람의 죄가 성전(제단)을 오염시킨 것을 정화시키기 위한 것인데 성전의 정결성을 회복시키는 제사이다. 번제는 감사제사로서 그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며 하나님과 그사람 사이를 평화의 관계로 확고히 맺어주는 제사이다.
4) 맺는말
문둥병으로 진 밖에 축출된 사람이 다시 자기 집으로 복귀할 수 있는 절차는 이와같은 정결의식과 제사를 통해 복귀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 피와 기름의 사용이 특히 중요하다. 생명이라 여기는 피는 성전을 정화시키는 역할도 하지만(정화제사) 레 14장의 경우는 이 피가 죽음의 영역에 있는 사람을 생명의 영역으로 이동시켜 그사람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다. 기름도 또한 신분의 변화를 일으켜 준다. 문둥병자의 회복은 개인의 생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공동체가 회복되고 성전이 정화되어 하나님께서 불편함이 없는 전 우주적인 회복과 화목의 관계로 그 영향이 확대된다.
III. 제사장신학의 공헌
제사장신학은 창조신학의 핵심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제사장은 창조질서를 유지하는데 봉사하고 죄와 부정으로 인해 그 질서가 깨어졌을 때 그 질서를 회복시키는 역할을 감당한다. 이러한 역할은 단순한 회복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새창조"의 역할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제사장신학과 제사의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조신학을 폭넓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며 또한 제사장신학을 이해함으로 창조신학을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다.
제사장 신학은 사람의 심리적, 정서적, 종교적 필요를 총괄적으로 충족시켜 주는 제사의식에 용해 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희생제물의 피와 정결의식의 피가 사용되어지는 모습 속에 그 핵심이 담겨 있다. 여러 다양한 의식은 그당시 편만했던 종교의식을 반영한 것이지만 제사장들은 야웨 종교의 독특한 신학을 창출하여 그 신학이 담긴 제사의식으로 전환하였는데 이러한 행위는 곧 개혁적인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야웨종교를 역사적으로 조망해볼 때 제사장신학을 체계화 시킨 P의 위치는 단순히 전통을 보존하고 체계화시키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 시대의 상황에 부응하는 개혁을 단행한 종교개혁가임을 알 수 있다. 성전에 있는 것은 모두 거룩하다는 신학은 P이전에나 P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다만 차이나는 것은, P이전에는 성전의 거룩함이 평민에게도 전달된다는 신학이 있었다. 즉 거룩하지 않은 평민이 거룩한 것을 보거나 만지거나 우연히 접촉한다 할찌라도 치명적인 해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법궤를 만져 죽은 웃사의 경우(삼하 6:6-7)와 법궤를 들여다보다 죽은 벧세메스 사람들의 경우(삼삳 6:19)가 바로 그러한 예들이다. 그러나 P는 성전의 기물들이 치명적인 힘을 행사하는 범위를 좁혀서 특수한 경우, 예를 들면 성막을 벗기고 해체하는 경우(민 4:15, 20) 외에는평민들이성전의 기물에 접한다 하여도 해를 당하지 않도록 하였다. P가 왜 이러한 개혁을 단행하였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면 첫째, 대중들이 성전을 두려워하여 가까이 오지 못하기 때문에 대중들이 성전에 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종교의 대중화의 길을 개척한 것이라 볼 수 있고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더욱 긴밀하게 연결시키는 신학을 수립한 것이다. P의 제사장들은 대중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이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공동체를 평안하게 하는 힘이 있으며, 하나님의 거룩함이 죽이는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힘을 발휘함을 가르쳐 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지 않은 방법으로 성전에 가까이 할 경우 역시 치명적인 해를 당하게 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명하시지 아니한 다른 불을 사용한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경우이다(레 10:1-2). 이러한 이유 때문에 P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에게 가까이 하는 방법 즉 제사방법에 대해 세밀한 설명을 해준 것이다. 제사장들은 제사방법을 통해 제사장신학의 핵심을 표현하였고 그 제사의식을 통해 시각적이며 청각적으로 그리고 후각까지 사용하는 방법으로 대중을 신앙교육시켰다.
P가 개혁을 단행한 두째 번 이유는 성전 기물 특히 제단에 닿기만 하면 평민이라고 거룩하게 된다고 하면 성전이 범죄자들의 피난처(asylum) 구실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역할은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왕정이 시행되고 있었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이러한 신학이 왕의 법집행에 방해가 될 수 있었다. 왕을 비롯한 사회 지도자들은 성전의 보호 권한을 축소시키기를 원했으며 P의 제사장들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수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H(성결법전)는 P의 신학에서 또다시 개혁한 신학으로 여겨진다. 연대적인 순서를 살펴보면, 밀그롬(J. Milgrom)과 노올(I. Knohl)의 주장에 의하면, P는 주전 8세기 중엽 이전에 작성되었으며 H는 주전 8세기 말엽에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P의 성막은 실로 성소였으나 H의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이며 H의 신학이 히스기야의 종교 중앙집중화 정책과 맥을 같이한다고 밀그롬은 주장하였다.
P는 창세기 1장을 바탕에 두고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 뿐 만 아니라 인류를 포함하는 신학을 제창하였으며 자연도 포함시키는 신학을 수립하였다. H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동물을 보호하였다. P는 성전 외에서 시행되는 일반 도살을 묵인한데 반해 H는 동물의 도살을 한정시켜 동물에 대한 폭력과 동물을 과도하게 도살하는 것을 방지하였다. 화목제의 경우 H는 한가지를 더 추가 하였는데 그것은 화목제를 드리지 않은 도살을 금지한 것이다. 만약 화목제를 드리지 않고 동물을 도살할 경우 살인자와 동일한 죄로 간주 되었다(레 17:3-4). H는 동물의 생명까지도 보호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P의 거룩한 영역은 성전에 국한되어 있고 거룩한 사람도 제사장과 나실인으로(민 6:5-8) 제한 되어 있지만 H의 거룩한 영역은 약속의 땅 전체로 확대 되며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룩하게 된다. H의 신학에는 이스라엘 안에 있는 나그네 까지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 그 땅을 오염시키게 된다고 되어 있다(레 18:26).
P가 강조하는 것은 성전이 이스라엘 백성의 도덕적 혹은 제의적 불법 행위로 인해 오염된다는 것이고 이 때 진 안에 있는 백성의 죄만 성전을 오염을 시키지 진 밖의 있는 사람의 경우는 성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한편 H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계약(레 26:15)을 위반함으로 성전이 오염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근친상간(레 18; 20:11-24)과 우상숭배(레 2:1-6) 등이다. 따라서 P의 경우는 제의적으로 정화제사와 속건제 및 대속죄일의 제사로 회복될 수가 있지만 H의 경우는 제의적인 범죄가 아니기 때문에 제의적으로 해결될 수 없고 범죄하여 땅을 오염시킨 백성은 그 땅에서 추방 당할 수 밖에 없다.
제사장신학이 강조하는 것은 궁극적인 화목이요 조화이다. 개인을 인간 공동체 속에서 파악하며 인간공동체를 자연과 하나님을 포함한 전체 공동체 속에서 파악한다. 이 전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을 이러한 공동체 속에 포함시키기에는 무리한 점이 있지만 제사장신학은 하나님이 인간으로 부터 크나큰 영향을 받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제사장신학은 인간의 위상을 한껏 격상시킨 것이다.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시 8:5)라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울려퍼진 찬양과 맥락을 같이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제사장신학은 여호와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의 존재를 거부하며 더구나 인간이 신을 조종한다는 사고방식을 철저히 배격한다. 제사장신학은 이 전체 공동체가 조화롭고 화목하여 생명체로서 활력있게 움직여 나아가기를 그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사장신학은 생명을 중요시하며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삶의 환경을 중요시하고 죽음을 배격하며 공동체 모두를 살리고 활력있게 살아가기 위한 신학인 것이다. 참으로 제사장신학은 하나님 나라의 구체화를 위해 노력한 신학이다.
IV. 맺는말
제사장신학의 핵심은 제사의식과 정결의식에 담겨 있으며 그중에서도 피를 사용하는 의식 안에 그 신학의 중심이 용해되어 있다. 정화제사의 피는 사람의 죄로 인해 오염된 성전을 청결하게 하는데 사용되며 레 14장에 나타난 정결의식의 피는 문둥병으로 인한 부정을 제거시키고 사람을 공동체 안으로 복귀시키는 회복의 역할을 수행한다. 레 14장의 속건제의 피를 사람에게 바르는 것은 회복을 완성시키기 위함이며 문둥병으로 인해 진 밖으로 축출당해 죽음의 영역에 있던 사람을 생명의 영역인 진 안으로 옮기는 영역이동을 완성시키기 위함이다. 기름을 바르는 것은 공동체의 신분을 박탈 당한 사람이 다시 공동체 일원으로 그 신분을 회복시키기 위함이며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한 절차이다. 이어서 정화제사와 화목제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으로 완전히 회복하고 자기 집에 머물러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제사장신학에서 피는 생명을 의미한다. 짐승을 죽여 흘린 그 피로써 제사장은 개인을 포함한 공동체를 살리는 의식을 거행한다. 특히 죄 문제를 해결하는 의식을 거행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죄인이 죄를 고백하는 회개이다. 회개는 고의적인 죄를 비고의적인 용서 받을 수 있는 죄로 죄를 가볍게 해주며 정화제사와 속건제를 시작할 수 있게 해준다. 제사장신학에서 의식이 중요하지만 표면적인의식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회개와 기쁨을 바탕으로 진행될 수가 있는 것이다. 공동체를 보호하고 공동체를 살리고져하는 제사장신학은 야웨종교를 대중화 시켜 백성들 모두가 하나님과 성전에 가까이 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고 하나님과 백성과 자연 모두가 하나의 공동체로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공동체의 일원임을 일깨워 주었다. 참으로 제사장신학은 하나님 나라의 구체화를 위해 노력하는 신학임을 알 수 있다.
제사장신학은 전통적인 종교 체제를 유지하고 옛 것 만을 고집하는 화석화된 신학이 아니라 그당시 시대상황에 민감히 반응하면서 고대 중동의 종교 상황 속에서 야웨종교의 독특성을 창출해 내며 기존의 야웨종교를 새롭게 개혁한 종교개혁의 신학이었다. 제사장신학 자체도 계속해서 개혁을 거듭하였음을 볼 수 있는데 P의 신학과 후대의 H의 신학의 차이점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제사장신학은 그 중심에 야웨 하나님을 모시고 있지만 인간의 위치를 한껏 격상시킨 신학이었으며 인간을 신뢰할 수 있는 존재요 책임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부각시켰다. 제사장신학은 창조신학의 큰 테두리 속에 있는 신학이며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임을 전제한 신학이요 피조물들이 하나님과 함께 힘차게 새로운 창조를 시도하는 개척자 정신이 가득찬 신학이기도 하다.
/ 계명대학교 대학원 교수
|